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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IC:15]초콜릿(김민정)

2016. 12. 26. 15:00

노네임포럼 T: TOPIC/김민정

초콜릿

*지난 '밤'편에서 이어지는 소설입니다.  

월요일이다. 퇴근 후 저녁에 먹을 음식을 고민하며 집을 향해 걸어오는데,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A의 모습이 보였다. 연신 입가로 손을 가져가며 입김을 부는 걸 보니 추운 날씨에 밖에 오래 서 있었나보다. 전화를 하지 그랬어. 무심코 말을 던지다 A의 발에 시선이 닿았다. 맨발에 슬리퍼. 급하게 집을 나온 듯 했다. A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웃었다. 나는 서둘러 문을 열고 집 안으로 A를 안내했다. 보일러의 온도를 올리고 물을 끓여 커피를 탔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걸터앉아 웃음기 하나 없이 케이블 채널의 개그 프로그램을 보았다. 꽤 오랜 시간 집안에는 개그맨의 대사와 방청객의 웃음소리만 가득 울려 퍼졌다. 나는 괜히 주방을 서성이며 냉동실의 오래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아침에 말려놓은 선반의 그릇을 정리했다. 프로그램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그녀는 마치 오늘의 날씨라도 묻듯 무심하게 말을 건넸다.

-,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친구는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오랜 시간 매만진 듯 꼬깃해진 쪽지에는, 연필로 휘갈겨 쓴 핸드폰 번호 하나가 적혀 있었다. 궁금해졌다고 했다. 잠든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는데 그 여자의 얼굴이 미친 듯 궁금해졌다고 했다. A는 나에게 그녀의 번호를 대신 등록한 뒤,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에 뜨는 여자의 프로필 사진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거야 쉽지. 나는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A는 중학교 때 만나 20년 이상 우정을 쌓아온 친구다. 깊은 우정을 생각했을 때 그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 역시, 불륜녀라는 타이틀을 지닌 누군가의 얼굴이 꽤나 궁금하던 차였다. 왠지 모를 이상한 사명감과 그것을 넘어서는 호기심에 이끌려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 정말. 그거야 일도 아니지.

A가 돌아간 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저녁을 먹었고 방청소를 했고 그와 동시에 밀린 빨래를 했다. 언제나 말끔히 치워두는 성격에 청소해야 할 것이 그리 많진 않았지만, 물건이 제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끔찍이 싫어하는 터라 청소는 약 3시간가량 꼼꼼히 진행되었다. 집이 실오라기 하나 없이 완벽한 상태로 복원되고 난 뒤, 나는 그제야 잠시 누워 책을 꺼내 들었다. 갑자기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책이 시시해보였다. 언제나처럼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다른 기분이었다. 조금 다른 것이 하고 싶었다. 좀 더 재미있는 것. 좀 더 흥미로운 것. 나는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A가 주고 간 쪽지를 펼쳐 그 안에 적힌 번호를 핸드폰에 등록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접속하는 비밀스런 암호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해두고 싶다. 재미보다 앞선 건 분명 사명감이었다. 친구를 위해 타인의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는 사명감.

여자의 핸드폰 번호는 0303으로 끝난다. 운이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0303은 얻기 쉬운 번호가 아니다. 번호란 건 으레 쉽고 반복적일수록 인기가 많다. 핸드폰을 개통하는 날 자신의 행운에 감탄했을 얼굴 모를 여자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03이라는 숫자도 그녀를 유추하는데 하나의 단서가 되었다. 3을 보아하건데, 그녀는 왠지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예를 들면, 여러 명이 앉는 테이블에선 굳이 눈에 띄는 가운데 자리는 피하려고 한다던가, 버스에서도 맨 앞자리나 맨 뒷자리처럼 극단적인 좌석이 아닌, 적당히 가운데에 섞여 앉아 안정감을 찾으려 하는 것과 같은 것들. 하지만 0은 조금 다른 면을 보여준다. 보통의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과는 상반되는, 0이라는 다소 독특한 숫자를 택함으로써 자신이 살아있음을 내보이고 싶어하는 그런 여자. 그렇게 안정적이지만 약간의 개성은 갖고 싶어하는 사람.

오직 핸드폰 번호라는 하나의 단서만으로 여자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던 중, 카카오톡에 여자의 프로필 사진이 등록되었다. 물론 여자의 번호를 등록하기 전, 나의 프로필 사진은 미리 확인해두었다. 나의 것은 굉장히 무난한 것이다. 성별이나 나이, 직업, 사는 곳 등 나라는 사람의 개성은 전혀 유추할 수 없는 어딘가에서 찍은 풍경 사진. 혹시라도 갑자기 나의 아이디가 그녀의 친구추천리스트에 등장할지라도, 나의 존재를 유추할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일단 카카오톡에 등록된 사진이 30여개에 달했다. 수시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싶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인 것 같았다. 메인 프로필 사진을 통해 확인한 그녀의 얼굴은 생각보다 꽤 미인형이었다. 긴 생머리에 연분홍 니트를 입고, 고양이를 안고 찍은 사진. 어깨 너머로 언뜻 보이는 침대를 통해, 자신의 집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의외로 순수한 사람인가? 하지만 몇 장의 사진을 넘긴 뒤 나의 생각은 크게 달라졌다. 살짝 가슴골을 드러내거나, 다리에 먼저 시선이 가는 짧은 치마를 입는 등, 교모히 배치한 몇 장의 사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진에서는 수많은 아트북이 꽂힌 자신의 책장이 찍힌 것도 있었다. 지적이면서 청순하고, 어쩔 땐 섹시한. 여자가 만들고 싶어하는 이미지가 선명히 드러났다. 원래 카카오톡 사진이란게 그런거 아닌가. 여러 장의 사진 모음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갖고 싶은 이미지만 보여주는 것.

나는 사진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섣불리 하나의 이미지만을 캡쳐하여 보내면 A가 무척 혼란스러워 할 것 같았다. 사진을 보내지 않더라도 A는 이미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나는 친구를 위해서라도 정확한 정보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좀 더 그녀를 추적해보기로 했다. 문득 그녀의 카카오톡 하단에 적힌 메일 주소가 눈에 띄었다.

'katspace0301@gmail.com'

확실히 고양이를 좋아하는구나. cat이라는 본래의 스펠링을 사용하지 못한 것은, 인기 많은 아이디라 등록에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katspace란 아이디는 이미 존재하겠지. 거기에 0301이라는 숫자를 복합적으로 더해 차별성을 둔 것 일테지. 나는 갑자기 예전에 아는 동생이, 소위 구글링이라는 것을 통해 전남친의 소식을 확인한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며 헤어지고 싶다는, 3년이나 사귄 전 남자친구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구글링을 통해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녀의 팁은 사람들은 본래 하나의 아이디만 사용한다는 것. 수많은 사이트를 다른 아이디로 바꿔가며 가입하기엔, 그 기억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란다. 전 남자친구가 주로 쓰는 아이디로 구글링을 하다가 그가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결국 그 글을 통해 마음에 둔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소식이 끊긴 뒤에도 동생의 집착은 계속 되었다. 어느 날은 검색을 하는데 전 남친의 이력서가 구글링에 걸려 들었고, 그것을 통해 새로 입사한 회사까지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던 우리는 그야말로 경악을 했었다.

왜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난 것일까. 그 순간 경악했던 나는 몰래 그녀와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친구를 위한 사명감 때문이었다. 나는 구글 창을 열고 ‘katspace0301'이라는 아이디를 검색 창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엔터 버튼을 눌렀다. 여자가 온라인상에 흘리고 간 여러 정보들이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눈에 띄었다. 여자는 최근 모 온라인 초콜릿샵에서 8상자의 초콜릿을 주문한 듯 했다. 거기에는 송년회 때 회사 직원들에게 나눠 줄 초콜릿 주문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여자는 직원들을 서포트하는 경영지원팀에 속해 있는 듯 보였다. 1상자에 24개들이 초콜릿, 그것을 8상자 주문했다는 것은 총 192개의 초콜릿을 주문했다는 의미다. 그것을 한 명당 5개 정도로 세분화하여 직원들에게 나눠줬을 경우 그녀는 약 40명 정도로 구성된 중소기업에서 근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부서 직원에게만 초콜릿을 나눠줬을 경우, 그보다 훨씬 규모가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을 수도 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다.

페이지를 넘기고 페이지를 넘기고 페이지를 넘기기를 반복했다. 쓸데없는 정보들도 많았다. 주로 영문 사이트들이었다. katspace0301은 그녀만 독점한 아이디는 아니었다. 베네수엘라에 사는 10대 남미 여자, 영국에 사는 금발 머리의 30대 여자도 같은 아이디를 사용하고 있었다. 평생을 살아가며 한 번도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katspace0301이라는 아이디로 묶인 세 명의 여자들을 관찰하는 것은 꽤 흥미로웠다. 자신들도 모르게 엮여있는 인연을 그와는 더욱 관계없는 제 3자가 지켜보고 있는 것은, 마치 내가 신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어쨌거나 내 관심은 한국에 살고 있는, 내 친구 남편의 불륜녀인 katspace0301이었다. 몇 개의 의미 없는 흔적을 뒤적거린 뒤, 나는 나지막히 감탄을 내뱉었다. 그녀의 SNS를 발견한 것이다.

 

* 다음 편 주제인 '떡볶이'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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