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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IC:12]소시지(김민정)

2016. 11. 1. 21:41

노네임포럼 T: TOPIC/김민정

 

 

 

* 지난번 주제 '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장고드? 미친새끼, 있어뵈는 이름은 다 갖다 붙였네?” 수화기 너머로 이야기에 집중하던 나의 오랜 친구 김경희는, 정말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해줬다. 또한 편지를 받은 뒤 취한 나의 행동에 대해서는, 나를 그 못지않은 미친년이라고 말하며 깔깔댔다. 김경희는 우리가 친구가 되기로 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꾸준히 나에게 냉정함을 유지해왔다. 가끔 언짢아질 때도 있었지만, 객관적인 평가를 원할 땐 그녀의 말을 신뢰하는 편이다. 그녀는 그가 그냥 상상력 풍부한 스토커에 불과하며, 그 수준이 정신병자에 가까운 것 같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 됐고. 빨리 경찰에 신고해.

그래. 내가 미쳤던 것은 맞다. 그러니까 그날부터 내 일상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답장을 하려했다. 미안한데, 별로 만날 생각이 없다고. 어디서 튀어 나온지도 모르는 당신을 만나러 그 복잡한 명동(심지어 제일 싫어하는 동네다. 서울 관광객의 절반이 모인 곳이었으니까. 약속 장소를 정하는 센스부터 외계인 같다고 생각했다)까지 갈 이유가 없다고. 그런데 외계인에게 어떻게 답장을 써야하지? 그는 완벽하게 잠긴 나의 침실에 들어와 스마트의 극한을 달리고 있는 이 시대에 굳이, 내 침대 옆에 손편지를 놓고 갔다. 영화를 통해 그간 자연스레 습득한 지식에 의하면, 아마도 그는 초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그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한 대목이 생각났다. 순간이동으로 내 방에 들어와, 침실에 편지를 놓고 사라진건가? 정신없이 자고 있는 내 모습도 봤겠지? 마음 한 켠이 찝찝해졌다. 정말 그날부터 나는 마음 놓고 씻을 수도 없었는데, 예를 들면 때를 밀거나 제모를 하거나 볼 일을 볼 때처럼, 여자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져야 하는 순간들. 나는 집이라면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무언가가 무너진 것 같아 심히 괴로웠다. 혼자 사는 집임에도 마치 낯선 타인과 함께 있는 듯 쭈뼛대다, 나는 이른 시간부터 침대에 몸을 뉘었다. 쉽사리 잠이 올 리 없었다. 새까만 방에서 자정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나는 결국 잠들기를 포기하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컴퓨터 앞에 주저앉았다. 컴퓨터 액정화면의 시퍼런 빛이 얼굴에 닿아, 마음고생에 상한 얼굴을 더욱 수척하게 보이게 했다. 인터넷 창을 열고 검색 창에 생각나는데로 키워드를 넣었다. ‘외계인, 편지, 소통, 답장, 데이트.’ 대부분 희미한 물체를 카메라에 담곤 외계인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혹은 외계인과 실제로 교감한 뒤 책을 낸 외국의 간호사까지 존재했다. 갑자기 눈이 크게 떠지는 문장을 발견했다. ‘일본 후쿠시마의 50대 회사원, 외계인 사진으로 수억원대 벌어’. 목구멍으로 마른 침이 꼴깍하고 넘어갔다. ! 돈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만약에 그가 정말로 외계인이라면 그 증거를 포착해 언론에 제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통장에 남아있는, 지나치게 짧은 길이의 숫자와 피곤한 직장 생활의 그림이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결국 나는 철 지난 달력을 북 찢어, 한참을 고민하던 문장을 적어내려갔다. 요컨대, 만나자는 이야기였다. 명동도 좋고 어디든 좋으니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볼 것인지를 알려달라고. 그리고는 혹시라도 그가 발견하지 못할까봐(그의 초능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모르므로), 똑같은 내용을 두 개나 더 적어 냉장고와 현관문 앞에도 놓아두었다. 그는 외계인이 맞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적어 둔 달력에 휘갈겨 쓴 내용이 그에게서 온 편지로 바뀌어져 있었으니까. ‘929일 토요일, 명동 롯데백화점 정문 앞

 

맛이 없어요?” 장고드릭헨드리게즈말로호세는 입에 소시지를 넣으며 무심하게 물었다. 그러더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모, 여기 반찬 좀 더 주세요를 외쳤다. 초능력까지 있었지만 응당 갖춰야 할 센스는 없는 사람이 아닌 외계인이었다. 백반집이라니. 데이트를 신청한 주제에 메뉴 선택이 고작 백반이라니. ? 순두부에 돼지불백도 시키지? 나는 불만으로 가득 차올랐지만, 그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지하며 그러려니 했다. 조용히 가방 속으로 손을 넣어, 친구에게 빌려온 카메라의 안녕을 재차 확인했다. 내가 명동 한복판에서 외계인과 백반을 먹고 있는 건 오로지 돈과 명성을 위해서라고, 다짐하듯 스스로에게 말했다.

, 외계인이라고 특별할 건 없었다. 편지에도 적혀있듯, 짧은 시간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는 정말 지구인과 흡사했으니까. 백화점 앞을 서성이며 나를 기다릴 때도, 자연스레 웃으며 인사한 뒤 음식점으로 이끌 때도, 그의 뒤를 따라가며 살핀 그의 옷차림새. , 연한 미색 폴로 티셔츠와 면바지, 적당히 낡은 로퍼와 가방, 뒤로 살짝 빗어 넘긴 단정한 머리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레 녹아들어, 명동에 있는 그 누구도 그가 외계인이라고 의심조차 못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가 영희네 식당이라고 적혀있는, 촌스럽게 낡은 간판이 달린 백반집으로 나를 안내했을 때, 그때야 분명히 알았다. 그가 외계인이라는 것을. 피부의 잡티가 낱낱이 들여다보이는 하얀 형광등 불빛 아래 앉아, 어쩔 수 없이 편하게 먹어야하는 백반을 마주하는 것은 지구인 여자로서 힘겨운 순간이었다. 그는 여기가 이 일대에서 유명한 맛집이라며, 전부터 이곳의 소시지 반찬을 꼭 먹어보고 싶었다고 순박하게 웃었다. 사실, 백화점에서 만나 걸어오며 그가 소시지 맛집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멋스러운 프렌치식 샤퀴테리를 상상했더랬다. 하지만 나의 상상과는 달리, 내 앞에는 분홍색 소시지가 놓여져있다. 슬프게도.

어쨌거나 이 새로운 생명체는, 물음표로 가득한 나의 얼굴을 보곤 천천히 운을 떼기 시작했다. 그는 B-613이라는, 지구에서 수억 광년 떨어진 은하계의 작은 별에 살고 있다고 했다. 장미꽃으로 뒤덮힌 아름다운 행성으로, 각자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갖고 있어, 마치 한국에서 제주도를 가듯 자유자재로 지구에 오나든다고 했다. 언젠가 자신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지구에서 만난 조종사에게 행성의 비밀을 말해버리는 바람에, 그와 관련된 도서가 출간된 적도 있는데 그것은 동화라고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진짜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는 내가 유치원 때 읽었던 <어린왕자>의 이야기가 동화가 아닌 실재하는 행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또 내가 미친 짓을 했구나, 그래서 이 황금같은 토요일에 미친 남자와 5천원짜리 짜장면을 먹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우울해져버렸다. “그런데요. 제가 지난 번에 서울 남산에 놀러갔을 때, 목이 말라 슈퍼마켓에 들어가서 생수를 사들고 계산을 하려는데, 정말 우연찮게 윤주씨를 보게 됐어요. 윤주씨는 그때 내 앞에서 삼각김밥을 계산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삼각김밥을 잡은 손의 새끼 손가락이 하늘로 치솟아 있더라고요.”

그는 나의 가늘고 긴 새끼손가락, 더군다나 이유없이 하늘로 길게 뻗은 손가락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고 했다. 그날부터 그는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매일 나의 손가락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왜 그런 습관이 생겼는지, 언제부터 그런 습관이 있던 건지, 그 습관은 항상 나오는 것인지, 혹은 특정 순간에만 생기는 독특한 습관인건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지. 그러다 자연스레 또 다른 궁금증이 물꼬를 틀기 시작했다고. 예를 들면 항상 8cm 높이의 하이힐만 고집하는 이유, 옷장에 이미 차고 넘치는데도 비슷한 스타일의 까만 옷을 사는 이유, 라테에 우유 대신 두유를 넣는 이유, 매일 잠들기 전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며 우울해하는 이유, 매일 아침 출근길에 이상한 80년대 음악을 틀며 차안에서 크게 괴성을 지르는 이유까지. A203 행성의 외계인들은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에 대해 궁금한 것이 무수히 늘어난다고 했다. 질문이 많아지는 것은 그 행성 사람들의 선천적인 특징이라고 했다. 그는 나 자신도 모르고 있던 김윤주라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나란 사람은 이상한 행성에서 온 외계인에 의해 하나씩 분석되어지고, 그렇게 또 다른 의미의 존재로 바뀌어지고 있었다. 나는 순간, 나도 모르는 공간에서 누군가 나에게 사랑에 빠져, 이렇게 나를 깊게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그를 들여다보았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낯선 생명체. 까맣고 깊은 눈동자.

김윤주?”

밥을 깨작대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데,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고개를 드니 오래 본 얼굴이 있었다. 몇 년 간 지나간 기억으로 나의 밤을 괴롭히던, 심지어 어리고 예쁜 여자와 결혼까지 해버린 나의 전 남자친구. 추운 계절마다 항상 꺼내 입던, 내가 유난히 좋아라하던 그 회색 니트를 입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알고 보니 영희네 식당은 그의 와이프가 좋아하는 단골집이라고 했다. 부인을 대신해 음식을 테이크아웃하러, 주말부터 이 명동까지 길을 나선 것이다. 나는 순간, 묘하게 현실 감각이 없어지며 멍한 기분이 들었다. 외계인이라는 낯선 생명체와 데이트를 하는데, 바람나서 도망가버린 옛 애인이 나타나다니. 심지어 허름해서 존재조차 모르고 지나칠 법한 이 백반집에서.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지 않은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그가 헛소리를 시작했다.

, 너 완전 예뻐졌다. 이쪽은 남자친구분이라고? 회사도 큰 곳으로 옮겼다며? 연봉도 엄청 높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잘 된 걸 보니까 좋네, 잘됐네.”

그는 계속 바보처럼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더니, 주문한 음식을 받아들곤 서둘러 가게 밖으로 나갔다. 엉거주춤 걷던 걸음은 왜인지 꼬여, 아무것도 없는 길바닥에 자빠지기까지 했다.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저런 말도 안되는 소리는 어디서 들은거야? 내가 저런 남자를 좋아했던 건가? 그에게 빠져 매일 밤을 술로 달래던, 그 시절의 내가 어처구니없이 느껴졌다. 맞은편에서 밥을 먹던 장은 말없이 가만히 웃기만 했다. 나는 그를 힐끔 바라보며 생각했다. 외계인의 행성에도 이별이 있을까? 초능력도 쓰고, 지구인과 달리 선진화된 문명사회에 살고 있으니, 어쩌면 영원한 사랑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을까?

우리 이거 다 먹고, 같이 영화 보러 갈까요?”

그는 슬그머니 웃으며, 마치 막 연애를 시작한 지구인처럼 멘트를 던졌다. 순간 팔꿈치가 테이블에 올려져있던 간장 종지를 건드렸고, 까만 액체가 테이블 밑으로 뚝뚝 떨어지며 치마에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난처한 기분으로 우물쭈물하다, 결국 엉겁결에 그러자고 답했다. 영화만 보고 집에 가야지, 정말 끝나자마자 바로 집에 가야지, 그 사이에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사진도 꼭 찍어야지, 주인이 가져다준 물수건으로 옷의 간장 물을 빼면서도, 나는 정말이지 계속 그 생각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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