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TOPIC:13]포도(김민정)

2016. 11. 20. 22:19

노네임포럼 T: TOPIC/김민정

 

 

 

포도.

 

남자는 묵묵히 길을 걸었다. 초겨울의 스산한 바람이 그를 스치고 지났다. 까만 밤의 신림동은 이상할 정도로 텅 비었고, 견디기 힘든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가 집에 오면서 발견한 인기척이라곤, 자동차 밑으로 황급히 숨어버린 고양이 한 마리 뿐이었다.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옷깃을 여민 그는 천천히 지난밤의 대화를 곱씹었다. 그녀는 분명 아니라고 했다. 완강히 고개를 흔들며 저항하듯 외쳤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체 내가 어딜 봐서, 너 정말 그것 밖에 안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그녀는 얼굴을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울먹이며 또 다시 말을 이었다. 너랑 만난 시간이 벌써 5년이야. 서로에 대해 알만큼 알고도 남는 시간이라고. 아직도 날 몰라? 정말 그래?

모를지도. 귓가에 생생히 울리는 그녀의 말을 되새기며, 그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말했다.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 결코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그는 알았다. 그녀와의 힘든 연애 후에 깨달은 것이었다. 물론 너무나도 믿고 싶었다. 함께한 시간을 생각하며 어떻게든 믿어보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눈에 본 것이 너무나 선명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끝난 지난 밤, 또 다시 지원했던 회사의 불합격 통보를 받았고, 소주 한 병이 담긴 봉다리를 들곤 그녀의 집으로 향했을 때, 미처 간다는 걸 말하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때, 그러다 그녀의 집에 들어가던 후배 녀석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그래. 남자는 여자처럼 주저앉고 싶었다. 주저앉아 울먹이며 소리치고 싶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절규하고 싶었다.

구직을 위한 남자의 시간은 늘어질데로 늘어지고 있었다. 꽤 괜찮은 서울권 내 대학을 졸업했지만 세상에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서울 내 상위권 대학을 성실히 졸업했다는 것만으로는, 그에게 어떤 개성을 심어주기엔 역부족인 듯 보였다. 졸업 후 승승장구 하리란 희망은 온데간데 없고 내는 이력서마다 낙방하기 일쑤였다. 운 좋게 최종 면접까지 간 뒤 떨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대기업 다니는 남자의 아내로 살고자 했던, 희망찬 미래를 그리던 여자친구의 표정은 점차 실망으로 뒤엉켰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상하게 전화를 받지 않는 횟수가 늘어나고, 간만의 데이트도 사정이 생겨 취소하는 일들이 빈번해지기 시작했던 때.

그는 아슬아슬한 철골 계단을 올라, 허름한 옥탑에 위치한 자취방의 문을 열었다. 뻑뻑한 자물쇠를 따고 쇳소리가 유달리 삐걱이는 문을 열었다. 저렴한 월세를 찾아 이사를 반복한 뒤, 정말 잠시만 머무를 거라 다짐하며 얻은 방이었다. 그렇게 다짐했던 게 1년을 꼬박 넘겼지만, 자신도 모르게 체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집 안 곳곳에서 풍겨오는 쾌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 안에는 습기를 머금은 옷가지와 먹다 남은 라면 봉지, 캔 커피 따위가 뒹굴고 있었다. 뭐가 문제일까. 냄새의 원인을 찾아 시선을 돌리기엔, 방의 모든 것이 문제처럼 보였다. 며칠 째 버리지 않고 내버려 둔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눈에 띄었다. 냉장고를 여니, 썩은 지 한참인 정체불명의 반찬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대충 창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한 뒤, 엉망으로 버려진 방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것은 모조리 버려 버리겠다고, 마치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듯 청소를 시작했다. 냉장고 안에서 썩을 데로 썩어 물이 생기고, 건조하게 말라버린 식재료를 끄집어냈다. 유통기한이 훌쩍 넘긴 우유와 먹다 남은 밥을 찾아내 버렸다. 식탁 위에 먹다 남긴 인스턴트 커피와 맥주캔도 봉투에 담았다.

그러다 식탁 위 의자에 놓인 보라색 박스가 눈에 띄었다. 지난 달 시골에서 엄마가 보내 온 포도 상자였다. 냉장고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곤, 그대로 잠들어버렸던 지난 달의 피로한 밤이 생각났다. 낭패였다. 뚜껑을 여니, 탐스럽게 여물었던 포도는 새까만 개미들로 뒤덮여 있었다. 이미 죽어버린지 오래인 포도는 개미에 둘러 쌓여 꿈틀대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남자는 잠시 헛구역질을 한 뒤 포도를 집어 하나씩 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사별한 뒤, 어머니는 갑자기 시골에 내려가 과수원을 일구겠다고 했다. 무엇을 심을 것이냐 물으니 희망에 찬 표정으로 포도를 심겠다고 했다. 시중에서 파는 품종과는 다른, 아삭하면서도 달콤한 포도를 키우는 것이 목표라면서. 의자 위에 놓인 포도는 엄마가 힘겹게 키워낸 첫 수확물이었다. 몇 년을 고생하며 일궈낸 아름다운 결과물은, 작고 보잘 것 없는 개미에게 빨려 그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남자는 화가 났다. 이 새끼들이. 이 새끼들아. 감히 너네가 뭐라고. ? ? 남자는 중얼대며 포도를 헤집다가, 개미가 잔뜩 묻은 포도알을 손에 쥐었다. 그리곤 그대로 입에 넣었다. 잘근 잘근 씹었다. 꾸역 꾸역 삼켰다. 그렇게 모조리, 남자는 상자 안에 있던 어머니의 포도를 모조리 먹어 치웠다.

'T: TOPIC > 김민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TOPIC:15]초콜릿(김민정)  (0) 2016.12.26
[TOPIC:14]밤(김민정)  (0) 2016.12.05
[TOPIC:12]소시지(김민정)  (0) 2016.11.01
[TOPIC:11] 밥(김민정)  (0) 2016.10.20
[TOPIC:9]햄버거(김민정)  (0) 2016.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