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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IC:11] 밥(김민정)

2016. 10. 20. 12:55

노네임포럼 T: TOPIC/김민정

 

 

아침에 일어나니 침대 옆에 편지가 놓여 있었다. 봉투에 담겨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안에는 작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누군가 혼자 사는 집에 침입해, 무방비 상태로 잠든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쪽지를 남기고 갔는데도, 나는 무섭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당장 회사 출근을 위해 바삐 준비해야 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이 편지의 존재였다. 나는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봉투의 앞면과 뒷면, 심지어 너무나 얇아 보이지도 않는 옆면까지도 깊게 들여다보았다. 고급스러운 씰로 봉인된 짙은 남색의 편지 봉투. 수신인을 짐작할만한 어떠한 단서도 보이지 않았다.

편지를 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그렇게 하지 않았다. 봉투를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고, 엉거주춤 욕실로 갔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잠옷을 하나씩 벗어 옷걸이 위에 걸쳐놓았다. 샤워기를 틀고 온수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듯한 물에 몸을 적셨다. 블루베리향 비누의 거품을 내어 온몸에 칠하고, 샴푸를 세 번 짜서 머리에 비볐다. 윗집에서 변기의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가족들의 부산한 소리. 벽이 얇은 빌라에서는 굳이 만나지 않아도, 윗집과 옆집의 움직임쯤은 쉽게 알 수 있다. 자취를 시작한지 오래인 나는 가끔씩 사람의 체취가 그리워, 아침이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윗집에서 풍겨오는 사람 냄새를 맡았다. 오늘 아침은 김치찌개인걸까? 매콤하면서도 칼칼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창으로 넘어왔다. 코를 킁킁대며, 치약을 밑에서부터 꾹꾹 눌러 짠 뒤 칫솔에 묻혀 입에 물었다. 짤데로 짠 치약은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힘겹게 가진 것을 내놓았다. 치약 사러 슈퍼에 가야하는데. 섬유유연제도 떨어졌고. 어제도, 심지어 엊그제 아침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기억해냈다. 치약이나 샴푸, 비누, 세제 같은 것이 떨어졌을 때, 엄마는 항상 떨어지지 않게 새것을 사다두었다. 나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런 사소한 것들에 관심 갖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생활 전문가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 입 안 가득 치약의 시원한 향이 퍼졌고, 얼굴도 모르는 윗집 식구들을 관찰하고 있었고, 한 때는 몰랐던 엄마의 세심함에 감탄했지만, 그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유영하는 순간에도 편지에 대한 생각은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머리를 말린 뒤 주방으로 가서 아침밥을 차렸다. 윗집처럼 밥에 찌개, 나물반찬 같은 것이 먹고 싶었지만 나의 냉장고엔 전혀 다른 것이 들어 있었다. 예를 들면 부분부분 썩기 시작해 찐득하게 물이 나오는 사과와, 유통기한이 3일쯤 지나 버릴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요거트, 비교적 최근에 사다놓은 달걀, 그리고 냉동실에 한가득 쌓인 얼린 밥. 결국 얼린 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린 뒤, 달걀후라이와 간장을 꺼내 밥에 넣고 비볐다. 그리고는 TV를 켜고, 채널을 돌려 매일 아침마다 보는 뉴스를 켰다. 뉴스 앵커는 중요한 핵심은 놓친 채, 가십지에서나 볼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로 중요한 시간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뉴스를 보며 밥을 씹어 삼켰다. 밥알이 갖고 있던 단물이 모두 빠져나올 때까지 씹고 또 씹으며, 아주 천천히 아침밥을 먹었다. 달걀밥의 맛을 느끼려 해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입맛이 없는 날이려니 했다.

환기를 하려 열어둔 창틈으로 서늘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설거지통에 대충 그릇을 팽개친 뒤, 옷장에서 한참을 골라 두툼한 니트와 치마를 꺼냈다. 거울에 대어보며 적당히 상하의의 색을 매칭했다. 생각해보니 엊그제 입었던 옷과 비슷한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귀찮아져, 그냥 회사에 출근하기 무난한 옷으로 골랐다. 입고 보니 엊그제 입었던 것과 똑같은 스타일이 맞았다. 옷걸이에서 꺼낸 옷을 걸어두려는데 보니, 손톱의 네일이 반쯤 벗겨져 있었다. 거울에 비친 머릿결은 염색물이 빠지고 푸석해져 있었다. 미용실엔 다녀온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희미했다. 꾸미기를 놓아서는 안되는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결국 또 다음으로 미룰 걸 안다. 그리고 역시나 그 많은 것을 하는 순간에도, 시선은 자꾸만 침대 옆의 편지 봉투를 향하고 있었다. 단단히 들러붙은 채 쉽사리 떨어지질 않았다. 마음을 억누른다는 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그래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가방을 들고 불을 끄고 현관문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다시 껐던 불을 켜고, 들었던 가방을 팽채치고, 방으로 곧장 뛰어 들어갔다. 한켠에 꾹꾹 억눌러놓은 마음은, 억눌렸던만큼 성급히 스프링처럼 튀어올랐다.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정말 세차게 방문을 열고는 다시 침대에 미끄러지듯 걸터 앉았다. 그리곤 침대 옆에 놓여져있던, 그 수상하고도 애잔한 봉투를 다시 손에 쥐었다. 찬찬히 봉투의 겉면을 쓰다듬어보았다. 까슬한 종이의 표면에는 아직도 글쓴이의 온기가 남아있는 듯 했다. 갑자기 코끝이 매워지며 눈물이 핑 돌았는데,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는 역시나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다시 또 한참을 망설이다, 그래 결국.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봉투를 열어, 안에 담긴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정말 뜻밖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저는 다른 행성에 사는 외계인입니다. 갑자기 편지를 보내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무서워하지 마세요. 저는 지구와는 조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을 뿐, 생김새나 하는 행동 같은 건 정말 지구인과 놀랄 정도로 흡사하니까요. 당신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래요 문득. 새가 날아와 창밖에서 지저귀는 햇살 가득한 아침에, 당신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어졌어요. 사람들이 유난히 북적대는, 명동이라는 곳이 좋아 보이던데요. 어떠세요? 우리 함께 밥 먹지 않을래요?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장고드릭헨드리게즈말로호세로부터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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