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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IC:9]햄버거(김민정)

2016. 9. 18. 23:11

노네임포럼 T: TOPIC/김민정

 

 

 

햄버거.

 

그래. 나는 여러 명과 연애를 한다. 많을 때는 8, 적을 때는 2명까지 내려간 적도 있다. 하지만 한 명과 사귄 적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서로가 힘들다. 툭하면 구속하려 하니 결과적으로 관계가 지루해진다. 그게 싫어 여러 명을 만나는거지, 내가 무슨 세기의 카사노바는 아니다. 친구놈들은 술만 마시면 나에게 말한다. ‘미친, 이 새끼 완전 정상이 아니네?’라고. 고등학교 동창, 대학교 동아리 친구, 심지어 얼마 전 당구치다가 친해진 개포동의 김창진이도 똑같은 말을 했다. 그리곤 말미에 은근슬쩍 부럽긴 부럽네라는 말을 끼워 넣는다. 부러우면 너네도 나처럼 살아. 그런데 한사코 그건 아니란다. 뭔가가 자꾸 두려운가보다.

자아. 렛 미 인트로듀스 마이 걸프렌즈. 간략히 내 여자친구들을 소개하겠다. 일단 4년째 만나고 있는, 영어학원에서 만난 캘리. 영어회화 수업에서 만났기에 우리는 서로의 영어 이름을 애칭처럼 부른다. ‘캘리양하고 부르면 제임스오빵하고 대답한다. 캘리는 귀여운 여자다. 생글생글 잘 웃고, 같이 있으면 마치 대학 새내기가 된 듯 싱그러워진다. 데이트 때마다 김밥, 샌드위치, 빵 같은 것을 만들어온다. 심지어 속옷도 분홍색만 입는다. 저번에는 하트가 크게 그려진 땡땡이 부라자를. 여하튼 통화할 때마다 오빵?’으로 시작하는 높은 톤의 명랑한 목소리가 특히 좋다. 오빵? 오빵? 그 소리가 듣기 좋아서 난 가끔 일부러 전화가 안 들리는 척 한다.

지혜는 소개팅으로 만났다. 소개팅에 나오기 전부터, 후배놈으로부터 내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소개팅에 나온 걸 보곤, 얘도 참 정상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높은 하이힐을 신고, 몸에 밀착되는 옷만 입고 다니는 지혜는 적어도 1분에 한 번씩 지나가는 남자들의 시선을 받는다. 같이 다니면 정말이지 묘한 우월감이 든다. 특히 가슴골부터 시작해 허리로 이어지는 라인은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진 석고상을 연상시키는데, 수 천 만원을 들여 힘겹게 만든 라인이라고 했다. 3년 간 백반만 사 먹고, 스타벅스 대신 믹스 커피 타 먹으며 모은 돈을 한 번에 쏟아부었다고. 물방울 모양으로 했다는데, 두 가슴엔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겨울철 쓰는 보온팩 같은 실리콘이 들어있단다. 가끔 두 가슴 속에 자리 잡힌 보온팩의 형상이 아른거릴 때도 있기는 하다. , 가짜여도 뭐 어때, 강남의 유명한 곳에서 했다는데, 비싼 돈 들여서 그런가 촉감도 좋드만. 그런 지혜와 만날 땐 철칙이 있는데, 딱히 인생의 깊은 이야기를 나누려 하지 말 것. 우리는 주로 몸의 대화만 한다. 말을 섞는 순간 싸움이 시작되는데, 몸만 섞을 땐 세기의 연인이 따로 없다. 참 신기한지고.

민희는, 그녀가 나를 먼저 꼬셨다. 대범하면서도 똑똑한 여자다. 4살 연상인데다 의사인, 내가 지금까지 만난 여자 중 가장 커리어가 좋다. 찬찬히 나의 연애 방식에 대해 설명했더니, 그녀가 먼저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민희와 데이트 할 땐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 좋다. 살면서 근처에도 가볼 일 없던 예술의 전당에 가서 클래식도 듣고, 지난번에는 함께 도쿄로 여행도 다녀왔다.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여자와 데이트하는 것은 꽤 유쾌한 일이다. 그들은 어른이 돼서도 재밌게 노는 방법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또한 내가 쓴 소설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한데, 그도 그럴것이 그녀의 지적 수준이 내 주변 지인 중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넌 지금 감정과 섹스, 지성을 갖춘 여자를 나눠 만나고 있는거네?

지금 내 앞에서 햄버거를 우적우적 씹고 있는 이 여자인 사람 친구. 최지희. 우리는 초등학교 때 만난 악연이다. 난 얘한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맞았다. 가만히 있는데도 다가와 등짝 스매시를 했다. 먹이사슬에서 나보다 윗단계에 위치한 나의 구원자가 아닌 포획자다. 20년 넘게 밤늦게 불러내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시키곤, 내 카드로 긁는다. 오늘은 햄버거를 두 개나 시키고 지랄. 목젖까지 넘어온 말을 간신히 구겨 넣는다.

-, 그런데 넌 맨날 왜 채소는 다 골라내고 먹냐. 빵에다가 패티만 넣어 먹는게 무슨 맛이야. 그리고 그렇게 먹으면 몸에도 안 좋.

-.

-?

-채소 먹는다고 햄버거가 몸에 좋을 것 같냐? 어차피 몸에 나쁜건 마찬가지야. 그리고 난 사실 햄버거를 먹는게 아냐. 소고기 패티의 맛을 즐기기 위해 빵을 함께 먹는 것뿐이라고. 아아 참, 그리고 나 결혼해.

순간 잘못 들었는가 고민했다. 사람들은 햄버거 먹는 이야기 뒤에 자신의 결혼 소식을 붙이지 않는다. 아니, 둘이 동급은 아니잖아? 그리고 결혼 발표는 말야, 거하게 술이라도 한 잔 사면서 말하는거고. 지금 너는 심지어 나한테 얻어먹고 있고?

-?

-왜라니. 하고 싶으니까.

-. 정말한 남자만 50년 이상 사랑할 수 있겠어? 2, 3년 연애하기도 어려운 판국에, 한 남자랑만 영화보고 밥 먹고 섹스해야 한다고.

-불가능하다는 건, 이미 너무나 잘 알아.

뭐 나도 남자지만 결혼이란게 그렇다. 화장실 변기에 오줌 튀겨가며 볼일 보는 남자랑 영화보고 밥 먹고 섹스하면서, 심지어 항상 설레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 아니, 그게 가능해?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한낱 제도에 의해 몇 십년 간 통제받을 수 있냔 말이다같은 논리를 펼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꾸물대며 뒤로 미뤄뒀던 질문.

-그래서형은 이혼은 했고?

-아니, 아직.

-아니라고?

-곧 한댔어. 어제 나한테, 곧 자기 와이프한테 말할 거랬어.

-저번에도 한다고 했잖아?

-이번엔 진짜랬어.

순간, 가게의 문이 열리며 술에 취한 남자가 들어왔고, 동시에 새찬 바람이 불어 들었다. 스산하면서도 외로운 바람. 계속 한 자리에서 비틀대던 남자는 거, 콜라 한 잔 줘보지 하곤 실실 웃으며 아르바이트생을 흝었다. 마치 위스키 한 잔 따라봐하고 말하는 것 같은 억양과 말투였다.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재빨리 카운터에 콜라를 올려놓곤 주방 깊숙이 사라져버렸다. 새벽 3시의 패스트푸드점은 별의 별 사람들로 들끓는다. 대부분 우리처럼 잠을 잃어버리고 몽롱한 모습으로 무언가를 먹는 사람들이다. 헤드폰을 끼고 햄버거를 우적우적 씹는 여자, 무언가 초조한 눈빛으로 식어버린 포테이토를 놓고 한참동안 창밖을 바라보는 고등학생. 그들의 자세한 내막은 유추하기 쉽지 않다. 단지 부유하고 있다는 느낌 뿐. 마음의 결은 너무나 세밀하고 복잡한 것이라, 사람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된다. 늦은 새벽에 햄버거를 먹는 사람들의 속마음은, 10월 중순의 외로운 바람과 더불어 부서지고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최지희만 봐도 그렇다. 초등학교 때부터 20년 넘게 봐왔지만, 도통 알 수 없는 행동을 할 때가 많다. 아니, 멀쩡하게 생긴게 불륜이라니. 얼굴도 예쁘장한게. 나를 자기 종처럼 부리는 나쁜 계집애였지만, 학교 다닐 때부터 집 앞으로 찾아오는 남자애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옆에 있는 나를 남자친구로 오인하곤 쓸데없이 마음을 단념하곤 했는데, 이 기지배가 그걸 노리고 나를 옆에 두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고등학교에 가서야 하게 됐다. 그때 만나던 남자가 이미 스무 살 많은 회사원이었다. 언젠가 술에 취해 어린 남자들에게 흥미가 없다는 말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관심 없어서 대충 듣긴 했지만.

-네 말처럼 끝이 보이는데, 그래도 하고 싶어. 그렇게라도 그 사람과 영원히 묶여있고 싶어. 결혼이라는 건 네 말대로 미쳐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나 지금, 좀 미쳤어.

그녀는 말 그대로 답지 않게 우수에 찬 눈빛을 짓더니, 다시 시큰둥하게 햄버거를 먹었다. 그런데 넌 왜 유부남을 만나는거냐? 돈 많고 나이 많은 사람말고, 돈 많고 나이 어린 사람이 더 좋지 않냐, 그건 네 말이 맞는데 나도 모르겠어 왜 이렇게 됐는지, 나도 뭐 동시에 여러 명 만나는 이상한 연애를 하는지라 딱히 할 말은 없다만, 그러니까 나 사실 이게 정신병은 아닐까 고민하다가 병원에 가볼까 한 적도 있었는데, 그게 무슨 정신병이야 아니다 사랑이 정신병이긴 하지 그런데 그런거면 이 세상 사람들은 다 미친놈들이야, 그래 뭐 너도 정상은 아닌데 그래서 내가 아직도 널 만나나, 근데 난 니 얘기가 좀 재밌는 것 같은데 언젠가 내가 니 얘기로 소설을 좀 써서 신춘문예에 응모해도 되냐, 그래서 당선되면 나한테 몇 프로 뗘 주는거냐……. 그런 얘기를 하다가 우린 맥도날드에서 나와 각자의 집으로 갔다. , 최지희가 카페 소사이어티라는 영화가 재밌다는데 주말에 보러가야겠다. 뭐라더라. 마지막 주인공들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는데, 어쨌든 로맨스 영화인가보다. 로맨스 영화는 캘리가 좋아하니까. 캘리에게 같이 보러가자고 해볼까.

 

*지난 샌드위치편에서 이어지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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