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빙수!
솔직하게 말하면 잡지사에 속한 에디터는 입발린 소리를 많이 듣는다. 브랜드 행사에만 가도 홍보 담당자가 세상에 없는 밝은 얼굴로 맞아 준다. 신입 시절엔 마냥 부담스럽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귀신 같이 익숙해졌다. 의례 하는 얘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종종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무실에 오면 ‘전성진 기자님’ 앞으로 온 샘플박스가 쌓여 있고 공연이나 전시 이벤트 초대장이 도착해있다. 취재를 가도 마찬가지다. 레스토랑 대표나 쉐프는보통 호의적으로 협조한다. 칼럼에 나올 음식을 굳이 다시 만들어 맛보고 가라고 할 때도 있다. 노동 시간에 비해 월급이 적은 편이지만 이런 점들 때문에 종종 일할 맛이 나는 것이 솔직한 심정(물론 이런 마음이 들면 백발백중 자신이 싫어진다)이다.
유명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다 퇴직한 분에게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몇 십년 동안 활동하던 기자직을 내려 놓자 매일 같이 쏟아지던 전화며 메일이 뚝 끊겼다는 것이다. 각종 샘플과 보도자료 그리고 달콤한 ‘기자님~’ 소리가 이렇게 단칼에 끊길지 상상도 못했다고 하셨다. 내심 생각했다. 언젠간 일을 나도 그만두면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려나…….
시작은 빙수 칼럼이었다. 첫 외고는 아니었지만 지금 하는 프리랜서 기자일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는 원고였다. 어느 기업의 외주 사보사에서 청탁 받은 칼럼이었는데 총 6군데의 빙수집을 턱없이 짧은 기간에 인터뷰 해야했다. 잡지사가 아닌 처음으로 이름을 걸고 올리는 칼럼이었기 때문에 긴장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데 섭외부터 쉽지가 않았다.
우선 계열사 빙수 전문점 취재부터 어려웠다. 계열사끼리 협력이 안됐는지 촬영 동의를 얻지 못했다. 사보라면 계열사 전체에 들어가는 소식지일텐데 촬영이 안된다는 게 의아했다. 나중에 들으니 워낙 기업이 커서 촬영 허가를 받으려면 많은 사람을 거쳐야 해서라고 했다. 평소에는 잡지에서는 홍보팀에 문의만 하면 바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는데 겪은 적 없는 일이었다.
일반 음식점의 경우는 사보 촬영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사보는 임직원에게 사내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리스트에 올라온 빙수집에 하나씩 전화를 돌렸지만 촬영에 응한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제의 빙수집과 통화를 하게 됐다.
문제의 빙수집 대표는 기업 이름을 듣더니 잠시 놀란 눈치였다. 얼마 안가 자기가 해본 각종 매체 촬영에 대해 20분에 걸쳐 일장 연설을 했다. 잡지 칼럼이었다면 진작 섭외를 포기했겠지만 확정된 리스트에 오른 빙수집이었기에 참고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대화 중 내가 음식잡지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니 급격하게 분위기가 좋아졌다. 촬영협조가 어려우면 따로 방문해 빙수를 사서 촬영을 할테니 그것만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대표는 쿨하게 수락했고 와서 직원에게 말해달라고 했다. 이때까진 일이 잘 처리된 줄 알았다.
촬영 당일 방문한 빙수집은 복층으로 된 제법 큰 공간이었다. 약속대로 빙수를 결제하고 직원에게 도착을 알렸다. 그는 대표에게 하필이면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모 기업에서 사보 촬영 온다고는 했는데 지들 돈으로 먹는다 했으니까 절대 무료로 주지 마세요. 돈 내기 전엔 절대 만들어 주지 마시고요. 촬영은 알아서 하라고 하세요. 절대 도와주지 마시고 꼭 돈 받고 보내세요. 절대 무료로 주시면 안됩니다. 알아서 빨리 하고 보내세요. 아셨죠?
전화가 끊어지고 나와 포토그래퍼 그리고 무엇보다 직원이 서있는 자리에 멈춰버렸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고 직원은 멋쩍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섭외 당시 전화 내용이 머릿 속에 둥둥 뜨면서 화가 욱하고 올라왔다. 촬영 포기하고 담당자에게 협조 못받았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대표에게 전화해 따져야하나? 고민하는 사이 빙수가 나와버렸다.
지금은 같은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촬영을 그대로 진행하는 것을 선택했다. 촬영이 끝나고 포토그래퍼와 얘기를 나눴다. 홍보담당자나 레스토랑 대표의 호의는 이제 놔줘야 할 것 같다며 농담 반 진담 반의 우스개 소리를 했다. 어쨌든 원고는 수월하게 넘어갔다.
빙수 칼럼은 마치 ‘프리랜서 기자로 살기-맛보기 ver.’과 같았다. 호의에 대한 기대는 내려 놓고 대신 상대에 대한 나의 호의 기본치를 올렸다. 결심이 흔들릴 때면 문제의 빙수집 대표가 섭외전화 당시 끊기 전 간절하게 했던 말을 떠올린다.
“근데 음식잡지 일하시면 저희 가게 기사 좀 내주시면 안될까요? 부탁 좀 드려요.”
글과 그림 전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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