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주스
딴 여자가 생겼다고 했다.
우리가 결혼한 것도 아닌데, 네 마음 이해해. 쿨한 척 했지만 마음이 푹 꺼졌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 떨어져 산산 조각났다. 이별은 친구들에게 돌아가는 가장 빠른 통로였다. 의리있는 그녀들은 함께 술잔을 기울여줬고, 그 옆에서 시든 화초처럼 비틀거렸다. 소주, 맥주, 막걸리, 보드카, 위스키, 와인…. 술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 것도, 인간이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변기를 붙잡고 토하다가, 아아 못 마셔, 이러다 죽을 것 같아 하다가도, 저녁이면 아메바처럼 소주를 마셨다. 넘어가지 않을 땐 억지로 구겨 넣었다. 그러면 적어도 그 순간은, 좀 나았다. 아니, 낫다고 믿고 싶었다.
-조금만 마셔요.
누군가 잔을 뺏어들며 귓가에 속삭였다. 흐릿한 눈을 연신 비볐다. 신촌의 맥주집, 테이블 중간 중간 남자들이 섞여 있었다. 반질반질한 얼굴에, 각 잡힌 정장, 가늘고 긴 넥타이를 맨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 옆 테이블과 합석했더랬지. 친구가 옆구리를 쿡 찌른 뒤 웃으며 눈을 흘겼다.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자라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회사에 들어간 남자들. 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이 연거푸 건네는 술을 계속 낚아채 대신 마셨다. 얼굴이 조금씩 빨개졌다. 깨끗한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 넓은 어깨와 좋은 냄새를 가진 남자였다. 자세히 보니 귀여웠다. 아니다. 많이 귀여웠다.
-안경…. 안경을 써요?
-하하, 네. 유전이죠, 뭐.
-멋지다. 안경 쓴 남자 좋아해요….
-그래요? 부모님한테 감사해야겠는데.
-혹시, 고양이…. 고양이 좋아해요?
-네. 어떻게 알았지? 집에 세 마리나 있어요. 고등어, 연어, 참치.
-…참치?
-어정쩡한 애. 어릴 적부터 뚱뚱했어요, 마치 참치처럼.
순간 정전. 남자의 얼굴이 코앞이다. 입에 혀가 연거푸 들어온다. 그는 갈래? 하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손을 잡아끌었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게, 언제부터 반말을 한 거지, 그런데 얘네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거야, 내 가방은 어딨지…. 힘겹게 생각을 잇는데, 쿰쿰하고 습기 어린 모텔 냄새가 들이 닥쳤다. 잠에 취한 주인이 건낸 치약과 칫솔, 304호의 열쇠를 받아들고, 빨간 카페트가 깔린 복도를 지나….
그렇게 사정이 끝났다.
갑자기 그가 싫어졌다. 사실 처음부터 싫었다.
콘돔을 정리하곤 바지를 올리던 그에게 말했다.
-어, 음. 미안해. 여기까지만 하자.
-뭐? 무슨 소리야, 갑자기….
-몰라, 나 갈게.
덩그러니 모텔 방에 남은 남자의 황당한 표정.
그는 어디에 가서 내 욕을 할 것이다. 시작은 아마 ‘있잖아, 어제 그 미친년이…’로 전개.
갑자기 허기가 졌다. 모텔에서 챙긴 토마토 주스의 뚜껑을 딴 뒤, 반쯤 꿀떡이다 길가에 던졌다. 아흐, 맛없어. 이게 뭐야. 고작 20% 넣어놓고 왜 진짜 흉내를 내. 100% 넣어도 맛없는 판에. 이름은 또 이게 뭐야, 리얼 토마토? 리얼은 미친,
잠깐 벗어놨다 신은 하이힐이 뻑뻑하게 느껴졌다. 발꿈치는 까져 붉은 살이 너덜거렸다. 힐을 벗어 가방에 처박아 넣고 편의점에서 산 삼선슬리퍼를 신었다. 직직 소리를 내며, 도시를 끌며 걸었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 차다. 두 팔로 몸을 끌어안았다. 이제 여름도 끝인가. 세상이 점점 미쳐 간다는데, 내가 그 선두인 것 같은데, 생각에 잠겼다 고개를 드니 마포대교가 보였다. 문득 겁이 났다. 눈치 보며 달려오는 택시를 잡아타곤 아저씨, 신길동이요. 아이고, 이렇게 늦은 시간에 집에 가요? 네, 야근했어요. 아이고오, 젊은 아가씨가 수고가 많네. 뭐, 다 그렇죠. 라디오 좀 키워 주실래요? 아이고오, 그럽죠.
FM 107.7에서 익숙한 노래가 나왔다.
바비킴의 사랑, 그놈.
더럭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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