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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안에서는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첫째로 휴가 중이기 때문에 정신을 또렷하게 차리고 싶지 않으며, 둘째로 커피잔에 콸콸 부어주는데 다 마시지 않으면 쏟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한동안 휩싸이게 되고, 마지막으로 괜찮은 디저트도 없는데 맛없는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면 책도 꺼내고 싶고 출입국 신고서도 작성해야 하는데, 평지에서도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에게 출렁이는 액체가 담긴 커피잔은 너무나 위험천만하다. 물론 멀쩡한 디저트를 주면 얘기가 달라진다. 체코 항공에서 체리가 들어간 노란 케이크, 그리고 화이트 초콜릿 치즈케이크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나왔을 때는 얌전히 커피를 받아서 조용히 야금야금 다 먹어 치웠다. 


그러고 보니 오트밀 레이즌 쿠키를 처음 먹은 장소도 미국 국내선 비행기 안이었다. 빈 기내식 그릇이며 커피잔까지 깨끗하게 정리하고 사람들을 재우기 위해 조명이 어두워질 즈음이었다. 승무원이 따끈하게 데운 쿠키가 하나씩 든 봉지를 나눠주며 지나갔다. 따뜻한 쿠키라니, 코코아 머그컵 다음으로 마음에 드는 핫팩이었다. 봉지를 열어보니 안에 든 쿠키는 건포도가 송송 박힌 오트밀 레이즌이었다. 예전부터 미국 콘텐츠에서 초콜릿 칩 쿠키인 줄 알고 먹었더니 건포도라고 화를 내는 장면을 자주 봐서, 막연하게 오트밀 레이즌 쿠키는 맛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건포도는 유난히 호불호가 갈리지만, 정작 나는 매우 좋아한다는 점을 간과한 넘겨짚기였다. 막상 먹어보니 고소하고 찐득한 것이 완벽히 내 취향이었다. 지금은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살 때마다 오트밀 레이즌 쿠키를 사서 쟁인다. 뭐든지 주면 일단 맛을 보고 볼 일이다. 


기내식은 아니고, 식사라기에는 주전부리에 가까울 정도로 허술하지만 제일 즐거웠던 이동 중의 식사는 동유럽을 가로지르는 야간열차에서 먹은 아침이었다. 헝가리에서 체코로 이동하던 날, 굴라시로 저녁식사를 끝내고 나서 열차에 올랐다. 침대 두 개를 설치한 침대칸은 벽에 붙은 위층 침대를 펴면 위아래 모두 높이가 애매해서 앉을 수 없고 무조건 누워야 한다는 단점 같은 장점이 있다. 당시 나는 할슈타트에서 핸드폰 액정을 박살 내는 바람에 와이파이 여부와 상관없이 강제로 아날로그한 여정을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쿠궁쿠궁 끝없이 이어지는 리드미컬한 기찻길 소리를 들으며 일기를 쓸 수 있었고, 선잠을 깬 순간순간 기차는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기차역을 지나치고 있었으며, 눈을 뜨자 새벽의 고요한 프라하였다. 열차 직원이 칸마다 문을 두드리며 커피와 비닐에 포장된 크로와상을 가져다주었고, 우리는 창가의 작은 테이블을 펴서 마지막 기찻길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한국에 돌아와 액정을 교체하니 그날 밤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국경을 넘을 때마다 자동으로 수신한 알림 문자가 서너 통 들어와 있었다. 아, 그날 밤 나는 기차를 탔었지. 봉지를 바스락거리며 크로와상에 커피를 마셨지. 부다페스트를 떠나 프라하를 만났지. 그랬었지. 


Writing&Drawing 정연주

Blog: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http://nonameprojectstory.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