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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평생 전기밥솥으로만 밥을 해본 사람의 쌀 정복기다.

 

한국인의 주식인 밥은 너무나 대단한 존재라서 구비구비 전해 내려오는 실패담도 많고, 한 마디씩 더하고 보는 사람들의 오지랖도 많다. 자칫하면 아래는 타고 위는 설익은 삼층밥이 되고 만다는 불조절, 냄비로 돌솥처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을 지을 수 없다는 쌀과 압력의 상관관계, 불은 껐지만 뚜껑은 열지 못하는 미지의 시간 뜸. 대체 쌀과 물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밥 따위에 얽힌 미스터리가 왜 이리 많은 것인가? 그래서 나는 평생 웬만한 가정집이라면 하나쯤 갖추고 있는 용병 전기밥솥에게 외주를 맡겨서 밥 짓기를 해결해왔다. 그나마도 처음에는 물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밥님이 망할까봐 무서웠다. 지금이야 수면이 적당히 손등을 기준으로 얼마나 올라와야 하는지 경험으로 파악했지만, 이것저것 넣어서 같이 밥을 지을 때 밥물을 어떻게 맞추면 좋을지 몰라서 당황하는 건 마찬가지다. , 너 왜 이렇게 어려운 거니.

 

이렇게 평생 밥 짓기를 외주에 맡기면 한 가지 애로사항이 생긴다. 쌀이, 그리고 밥이 무서워진다. 변화하는 중간 과정이 도무지 가슴에 와닿지 않으니까. 가마솥에 밥을 짓던 할머니는 뜸을 들일 때 밥 위에 밀가루를 묻힌 고추를 얹어서 찐 다음 양념장에 버무렸다던데, 뜸을 들일 때 뚜껑을 열어도 밥이 망하지 않는단 말이야? 우리야 햇반을 사서 갔지만 MT에서 냄비밥을 짓기도 한다던데, 그걸로 지은 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이야? 쌀이 물 먹고 말랑해지면 밥이니 새삼 돌아보면 하등 쓸모없는 두려움이지만, 어쨌든 이 모든 불안을 해소해주는 밥솥이라는 존재가 있으면 굳이 내가 밥 따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주물 냄비, 그러니까 스타우브로 밥을 짓기 시작했느냐면 매달 연재중인 칼럼을 위해 레드 라이스를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밥을 붉게 물들이는 안나토 씨앗의 착색력이 강력하다는 얘기에 문득 전기밥솥으로 떡볶이를 만들다가 붉은 증기로 벽지를 온통 시뻘겋게 물들이고 말았다는 비극적인 사고현장이 떠올랐고, 즉시 전기밥솥을 논외로 돌리고 말았다. 차선책으로 어쩔 수 없이 꺼낸 냄비가 바로 스타우브 16cm 주물 냄비였다. 밥이야 밥솥으로 짓는데다 뭘 끓이기에는 너무 아담해서 과연 쓸 일이 있을까 갸웃거리며 구석에 처박아 둔 비운의 주인공이 세상 빛을 보는 순간. 개시를 하게 된 건 좋은데, 더 넣으면 밥물이 넘친다는 말에 달랑 한 컵짜리 쌀을 붓고 나니 정말 쌀이 바닥에 잔잔하게 깔려 있는 형상이었다. 요만큼 넣었는데 넘친다니 역시 밥은 미스터리야. 제대로 밥이 되긴 하는 걸까? 아까운 쌀을 버리는 거 아니야? 그런데 웬걸, 전기밥솥보다 맛있는 밥이 완성되었다. 왜 맛있지? 그런데다 전기밥솥에 외주를 맡길 때와는 달리 묘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이 기분은 또 뭐지?

 

이후 도무지 내 마음 나도 몰라의 상태로 밥을 먹을 때마다 스타우브를 꺼내서 불에 올렸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밥을 네 번 지으면 두 번은 밥물이 넘쳤고, 보온해 둔 밥이 없으니 끼니 때마다 밥을 지어야 했고, 버튼만 누르면 되는 밥솥과 달리 때가 되면 불을 꺼야 하는 귀찮음이 상주하는데도 왠지 즐거웠다.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처음으로 쌀이라는 식재료와 밥이라는 요리가 친숙하게, 솔직히 만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버려봤자 쌀 한 컵이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불안하면 물도 더 넣어보고, 불끄기를 깜박해서 5분 정도 더 익히기도 하고, 중간에 뚜껑을 열었다 닫아보기도 했는데 밥은 그리 쉽게 망하지 않았다. 내친 김에 SNS에서 유행하는 토마토밥도 지어보고, 제철에 까서 냉동한 완두콩도 한 움큼 넣어서 완두콩밥도 지었지만 한 번에 성공했다. 뭐야, 뭔가 대단한 기능으로 밥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한 전기밥솥이 아니어도 밥이 되잖아.

 

그 후로 3주가 지나도록 전원이 내려간 밥솥은 기약 없는 휴가를 즐겼다. 그간 밥을 한 번 하면 귀찮다는 이유로 내도록 보온을 켜 두었으니, 아마 다음 달 전기요금은 조금이라도 줄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타우브로 밥을 지으면서 얻은 이득은 광열비 절약뿐만이 아니다. 여차할 때 밥솥이 사망하더라도 밥을 지을 수 있다는 자신감, 미지의 영역을 정복할 때마다 보상으로 따라오는 자유로움. 부끄러울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드디어 외주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우리집 밥을 책임지는 존재는 밥솥이 아니라 나라고 말할 수 있다.

 

스타우브로 밥 짓는 법

스타우브 주물 냄비는 뚜껑이 묵직하고 고정이 잘 되는 데다 뚜껑 안쪽의 돌기에 맺힌 물기가 다시 아래로 떨어져서 촉촉함을 유지하여 밥 짓기에 좋다. 하지만 제일 큰 장점은 그냥 밥일 뿐인데도 주걱 하나 턱하니 꽂아서 식탁 가운데 올리면 마치 주인공처럼 예뻐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스타우브 냄비는 16cm짜리. 안타깝게도 2인분 이상의 밥을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크기다. 종이컵을 기준으로 쌀을 한 컵 퍼서 씻은 다음 1:1.2로 밥물을 잡아 냄비에 붓는다. 쌀을 불렸다면 1:1로 넣어도 된다. 중간약불에서 약불 정도에 얹어 22분간 익힌 다음 불을 끈다. 끝이다! 토마토처럼 물기가 많은 재료를 넣었으면 물을 조금 줄이자.

{스타우브 주물 냄비로 짓는 레드라이스와 토마토밥 레시피: 旅路食 레드라이스와 토마토밥 - 도전기(http://nonameprojectstory.tistory.com/35) 참조}

 

Writing&Drawing 정연주

  Blog: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http://nonameprojectstory.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