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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IC:3] 달걀(김민정)

2016. 6. 11. 23:55

노네임포럼 T: TOPIC/김민정

 

나야, 지민이. 잘 지냈지? 아니, 잘 지내고 있지? 네가 전화 받지 않아 다행이야. 그랬다면 난 전화를 끊었을테고, 아마 다신 수화기를 들지 못했겠지. 기껏해야 꿈에서나, 그래. 그렇게 그리움에 취해 전화했을 거야. 알잖아, A형이라 소심한 거. 넌 당연히 잘 살고 있겠지? 좋은 사람이니까. 누군가에게 듬뿍 사랑 받으며 순간에 집중하고 있을테지. 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네. 지금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어제, 죽으려고 약을 좀 먹었어. 운 나쁘게 깨어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충동적인 건 아니었고. 아니, 조금은 충동적이었으려나.

어제 아침, 남편이 나한테 달걀을 던졌어.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여는 그에게, 내가 사소한 질문을 했고. 그게 그의 신경에 거슬렸나봐. 그 동그란 물체가 나에게 날아오는데, 하하. 그래도 일말의 애정은 남아 있었는지, 내가 아닌 벽에 부딪혀 사방으로 깨져 나가더라. 하지만 난 그 달걀에 맞은 것과 다름없었어. 마음은 갈갈히 찢겨나가 붉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으니까. 그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며 나에게 썅년이라고 소리지르더라. 내가 그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해.

우리는 석 달에 한 번 정도 섹스를 해. 별로 야한 이야기는 아냐. 그건 마치 동물의 교미와 같거든. 갑자기 TV를 보다가 내 위에 올라와 자신의 바지를 내리곤 갈증을 해소하지. 난 병풍처럼 가만히 누워있기만 해. 그땐 주로 어릴 적 놀이터에 있던 시소를 생각해.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냥 기계처럼 타던 그 시소 말이야. 그러다 보면 시간은 빨리 지나가. 가끔 그의 눈을 보곤 하는데, 신기하게도 그 속에 내가 보이지 않아. 우린 같이 있지만, 서로의 존재를 딱히 느끼진 못해. 싸울 때를 빼곤. 그땐 정말 죽일 듯이 싸우니까.

난 지금 4인 병실에 누워있어. 앞엔 머리를 민 유치원생 여자애가 있는데, 애가 좀 많이 아픈가봐. 엄마는 아이 옆에서 종일 동화를 읽어줘. 좀 전에는 신데렐라를 읽어줬는데 결말에 다다랐을 때 아이가 짓던 순수한 표정을 잊을 수 없어. “엄마, 나도 신데렐라처럼 왕자랑 결혼할래라고 하더군. 아이의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표정으로 그래, 우리 딸. 당연히 그렇고 말고하며 웃었고. 난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소리 죽여 울었어.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지. 대체 그 빌어먹을 작가는 누굴까?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면 행복할 거라는, 그런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어떻게 생각해낸걸까? 난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어. "아가, 왜 동화에 속편이 없는지 아니? 2편으로 가면 더 이상 동화가 아닌, 썩은 내 나는 현실이 되거든. 그 왕자가 첩을 들였는지, 둘의 섹스 라이프가 어땠는지, 혹은 서로의 부모가 어떤 식으로 생겨먹었는지 같은 이야기를 해야만 한단다."

결혼은 미친 짓이야. 한 침대에 누워 상대방의 입 냄새를 맡고, 감지 않은 머리와 기름 낀 얼굴을 마주보며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결혼한 뒤로 난 한 순간도 살아있음을 느낀 적 없어. 현실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사랑의 해피 엔딩을 원한다면 둘은 반드시 헤어져야만 해. 언제나 미화되는 추억 속에만 존재하며,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기억돼야 한다고. 그런 의미에서 동화는 틀렸어.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했으니까. 어제 먹은 약이 왜 듣지 않은 걸까? 멍하니 내 옆에 앉아있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내가 결혼 전 어떻게 그를 사랑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동화는 없다고, 누군가 나에게 진실을 알려줬더라면 좋았을텐데. 미안해. 오랜만에 전화해서 이런 이야기밖에 못하다니. 그래도 넌 행복했으면 좋겠어. 꼭 그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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