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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그 대상이 어떤 형태를 띠어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가벼운 강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시시때때로 곱씹는 주제다. 하지만 결론이야 어떻든, 가을의 결실이자 겨울의 주전부리인 밤만큼은 달콤해야 애정이 샘솟는다. 그래, 반드시 달아야 한다.

 

어릴적 만화 속에서 보던 것처럼 화로에서 군밤을 굽는 시절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파는 군밤을 사 먹는 일은 절대 없다. 얼마나 익혔는지 그야말로 고무처럼 질기기 일쑤니까. 어머니가 간단하게 삶은 밤을 반으로 잘라 주면 작은 그릇을 든 것처럼 찻숟가락으로 파먹곤 했지만, 꼬물거리며 먹는 재미가 있었을 뿐이지 부슬부슬한 밤맛의 매력에 이끌리지는 않았다. 처음 밤을 먹고 놀란 순간은 뜬금없이 서커스를 보러 갔을 때 좌판에서 구입한 손톱만한 단밤을 만났을 때였다. 동글동글 자그마한 밤을 까면 촉촉한 알맹이가 톡 튀어나오는데 달콤해! 왠지 속살도 갈색으로 반짝거리는 밤 미니미처럼 생겼는데 말랑하고 달아! 알고보니 밤에게 부족한 점이라고는 단맛뿐이었다. 달콤하기만 하면 봉지 따위 간단하게 바닥을 보일 때까지 무념무상으로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주밤을 한 자루 선물받은 올해는 밤조림을 양껏 만들어 오만 곳에 넣어 먹기로 결정했다. 어디에 더해도 두드러질만큼 달콤한 밤맛이 가득한 밤조림을 만드리라! 그렇다면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할까? 반들거리는 프랑스의 밤 설탕절임, 마롱 글라세다.

 

마롱 글라세는 밤의 속살 모양을 있는 그대로 살리기에 아름답다. 하지만 집에서 밤을 절일 때 가장 귀찮은 단계가 바로 속살 모양 살리며 껍질 벗기기다. 눈 앞의 밤은 무려 한 자루. 도저히 속껍질까지 정성스레 벗겨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밤 전용 가위 없이 딱딱한 밤을 칠 생각도 없었으므로 최대한 힘을 들이지 않고 껍질 벗기기에 돌입했다. 우선 밤을 두어 시간 물에 담가 겉껍질을 부드럽게 불린다. 칼로 겉껍질만 가볍게 벗겨낸 다음 냄비에 넣고 밤이 푹 잠길 만큼 물을 부어서 10분 정도 팔팔 끓인다. 이제 주름을 살리고 싶다면 조심스럽게 속껍질의 섬유질을 벗겨내고, 그냥 모양만 내고 싶다면 과도로 최대한 과육의 손실이 적도록 속껍질을 깎는다. 껍질이 부드러워져서 힘은 비교적 덜 들지만 그래도 시간은 꽤 걸린다.

 

껍질을 벗긴 밤을 기준으로 500g당 설탕은 300g, 물과 설탕의 비율은 1:1이 필요하다. 냄비에 밤과 설탕, 물을 붓는다. 향긋한 밤절임을 만들기 위해서 바닐라 빈을 반으로 갈라 씨를 긁어내고, 씨와 함께 깍지도 냄비에 넣는다. 불에 올려서 설탕이 녹을 때까지 저은 다음, 팔팔 끓으면 15분 정도 뭉근하게 익힌다. 불을 끄고 시원한 곳에 옮겨서 12~16시간 정도 보관한다. 다시 불에 올려서 5분 정도 바글바글 끓인다. 다시 12~16시간 동안 재운다. 시럽이 전부 밤에 스며들 때까지 반복하라는데, 느긋하게 네 번 정도 반복했지만 시럽이 다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밤은 이미 충분히 달콤해졌기 때문에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정통 마롱 글라세를 완성하려면 낮은 온도의 오븐에 설탕에 절인 밤을 넣고 충분히 말려서 보관하면 된다. 하지만 이왕이면 부드러운 질감으로 먹고 싶었기 때문에 시럽째 밀폐용기에 담아서 냉장보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마롱 글라세라기보다는 마롱 글라세 '' 바닐라 밤절임인 셈이다.

 

머리가 찡할 정도로 달콤하고, 가을 햇살과 함께 바닐라 내음을 풍기는 밤 설탕절임. 말랭이는 쪼그라들고 잼은 졸이지만, 제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또다른 존재로 탈바꿈하는 저장식은 그 나름의 철학적인 매력이 있다. 술병 바닥에 가라앉은 체리나, 나뭇가지에 매달린 시절만큼 부풀어오른 수정과 속 곶감처럼. 베이킹으로, 단팥죽 속 고명으로, 몽블랑으로 점철된 겨울을 나게 해줄 바닐라 밤절임도 마찬가지다.


바닐라 밤절임

 

재료

밤(껍질 벗긴 것 기준) 500g, 설탕 300g, 물 300ml, 바닐라빈 1개

 

만드는 법

1 밤은 두어 시간 물에 담가 겉껍질을 벗긴다. 냄비에 넣고 밤이 잠길 만큼 물을 부은 다음 10분 정도 삶는다. 속껍질까지 완전히 벗긴다.

2 냄비에 껍질 벗긴 밤과 설탕, 물을 넣는다. 바닐라빈 깍지를 세로로 반으로 가른 다음 씨를 긁어낸다. 바닐라빈 씨와 깍지를 냄비에 넣는다. 불에 올려 끓으면 15분 정도 뭉근하게 익힌다.

3 냄비를 시원한 곳에 두고 12~16시간 정도 재운다.

4 냄비를 다시 불에 올려 5분 정도 바글바글 끓인 다음 다시 시원한 곳에 12~16시간 정도 보관한다. 시럽이 밤에 전부 스며들거나 밤 맛을 봐서 원하는 당도가 될 때까지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밀폐용기에 넣고 냉장보관한다.

6 원한다면 100도로 예열한 오븐에 설탕에 절인 밤을 넣고 2시간 정도 말린다. 

 

Writing&Picture 정연주

  Blog: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http://nonameprojectstory.tistory.com/